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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HA
한가로운 오후였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낙비가 반쯤 열려 있던 창문을 때렸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오소마츠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을 걷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를 감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상청은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아침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을 떠올리며 비가 들이치지 않게 창문을 닫았다. 빗소리가 단절되니 의미 없이 켜두었던 라디오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하세요~ 러브~」
“러브~ 러브~ 레볼루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cm 송을 따라 흥얼거렸다. 요새 한참 유행인 cm 송은 광고 내용과 별개로 귀여운 검은 고양이 마스코트와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세뇌 수준의 중독성을 일으켰고 그건 오소마츠도 다를 바 없었다. 후크송은 이래서 문제야. 이미 한참 전에 다른 광고로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돌림 노래처럼 가사를 웅얼거리며 생각했다. 사실 조금 전까지 가득 들어차 있던 생각보다 차라리 cm 송을 흥얼거리는 게 나은 편이긴 했다. 오소마츠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영화표를 집게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멍청하게 손가락만 빨지 말고 영화라도 보자고 말이라도 붙여봐!’
답답하게 구는 오소마츠를 보다 못한 그의 친구, 치비타가 준 영화표였다. 영화 내용은 희대의 괴도와 그것을 쫓는 형사의 추격 극이었는데 표가 없어서 못 판다고 할 정도로 흥행하고 있었다.
‘남자 둘이 로맨스 영화 보는 것도 웃기지만 이건 이거대로 악취미 아니야? 분위기고 뭐고 잡을 수가 없잖아.’
오소마츠가 치비타의 작은 손에 들린 표를 보며 툴툴거리자 치비타의 넓은 이마에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핏대가 섰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 새끼가 여태껏 데이트 신청 한 번을 못했냐며 핀잔이란 핀잔은 모조리 들을 수 있었다. 전부 사실이라 변명 한마디 못하고 표를 도로 무를세라 냉큼 받았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공짜 표가 생겼다고 은근슬쩍 권유해 보자.
치비타의 충고를 떠올리며 다짐하길 수차례. 한참 영화표를 노려보던 오소마츠가 이번엔 문 옆에 둔 행거 쪽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셜록 홈즈의 팬이라는 말에 큰맘 먹고 산 갈색 사냥 모자가 개시도 하지 못한 채 덜렁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더욱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모자를 산 게 벌써 일주일 전 일이었다.
처음에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바쁜 것이겠지 라며 에둘러 마음을 달랬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매정하기 짝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설사 자신과 비즈니스적인 관계여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연락이 없을 수 있나? 먼저 연락을 해볼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바쁜 사람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예전 같았으면 상대에 대한 배려고 나발이고 일단 덤비고 봤던 것을 생각하면 철이 좀 들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그를 신경 쓰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시발점은 오소마츠 본인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들어서야 인정할 수 있었고, 인정하고 나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데이트 신청이라든지 혹은 더 나아가 겁 없이 고백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정말 어쩌려고 이러냐. 오소마츠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다.
종종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는 남자. 일이 바쁘면 흐트러질 법도 한데 항상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셔츠 위에 조금 낡았지만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중절모와 바바리코트를 걸쳤다. 셔츠 깃 사이로 빈틈없이 조여진 넥타이와 유행이 한참 지났지만 반질반질하게 손질된 구두를 신고 살짝 아래로 처진 눈썹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오소마츠군, 시간 괜찮나?’라며 찾아오는 남자.
“그 cm 송이 요새 유행이긴 한가 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괴고 있던 턱을 풀었다. 빼꼼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중절모와 코트가 평소보다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근래에 오소마츠의 머릿속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선 비켜줄 생각조차 없는 뻔뻔한 그 남자.
“형사님?”
“오소마츠군, 시간 괜찮나?’
쵸로마츠 경부가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곤란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